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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김이슬 기자 사진 윤주성 프리랜서· Play31 제공



모든 답은 어린이에게 있다
 
지난 9월, 서울문화재단 주최로 열린 <어린이 시티 플래너> 워크숍 현장. 어린이가 직접 내가 사는 도시를 재구성해 보는 프로젝트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투닥투탁하며 집중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행사를 진행하는 건 엄효정 어린이 문화 디자이너다.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다양한 질문을 적절히 던져 가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반짝이는 눈으로 아이들을 세세히 관찰하기도 한다. 이름부터 생소한 어린이 문화 디자이너는 어린이를 위한 놀이 도구부터 놀이 상황까지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어린이 마음을 잘 헤아려야하기에 이러한 현장에 자주 참가한다고 설명한다. “생생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현장은 디자이너로서 굉장히 중요해요. 아이들의 의견 으로부터 디자인이 시작되거든요. 현재 대부분의 어린이 디자인 에는 어린이의 의견이 빠져 있어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많은 현장에 참가하여 소통하려고 합니다.” 
 소통이 효과를 거두려면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이건 안돼”, “이게 맞지 않을까” 하는 말은 절대 금물이다. 충분한 ‘격려’ 하나면 된다. 그렇게 만들어 낸 결과물은 어른들의 눈으로는 쉽게 생각해 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 다. <어린이 시티 플래너> 워크숍 현장에서도 그러한 결과물이 나왔다. 아이들은 ‘공공장소에서 뛰시오’ ‘혼내지 마시오’ 등의 표지판을 만들고, 놀이 기구와 장난감이 없는 바깥 놀이 정류장을 만들어 냈다. 또한 무지개색 도로에, 어린이 사고 걱정 없는 상상의 공간 등 기발한 것들을 생각해 냈다. 이에 엄효정 디자이 너는 ‘아이들은 이런 걸 틀림없이 좋아할 거야.’라고 어른들이 단정하며 만든 것과 아이들의 의견을 물어서 결과 물을 내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단언한다. 때문에 그는 오늘도 현장을 발로 뛰며, 수많은 아이의 마음을 노크하고 있다.
 
국내 1호 어린이 문화 디자이너
 
처음부터 어린이 문화 디자이너를 꿈꾼 것은 아니다. 서울의 한 대학 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우연한 기회로 한 회사에 들어가 팬시 디자이너가 됐다. 수입도 쏠쏠했고 실력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안정된 일이었지만, 15년간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답답함이 몰려왔다. 이 자리에서 만족할 것인지 새로운 일에 도전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고민을 거듭하는 순간,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자!’ 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고, 결국 그 생각은 회사를 그만두게 했다. 때마침 스웨덴의 한 대학에 어린이 문화 디자인과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딱 발견하자마자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이거다 싶었죠. 스웨덴에서도 새로 개설된 학과여서 정보는 거의 없었지만, 딸아이의 엄마이자 디자이너로서 꼭 배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유학길에 올랐어요.”

다행히 공부는 적성에 맞았다. 공부에 재미가 붙으니, 어린이 문화 디자인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러한 열정은 성공으로 이어졌다. 스웨덴의 한 어린이 박물관이 방문객을 위한 디자인을 해 달라며 의뢰를 해 온 것이다. 머리를 쥐어짜며 많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기 위해 노력했다. 답은 ‘아이’에게서 나왔다. 아이들과 함께 워크숍을 가진 후 콘셉트가 명확해졌다. “아이들을 박물관에 데려가서 견학을 시켰어요. 박물관의 길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어 길을 잘 찾지 못하더라고요. 그런 부분을 아이들에게 많이 물어보았고 그것이 영감이 되어 디자인으로 이어졌죠.”

엄효정 디자이너는 글을 잘 못 읽거나 지도가 없어도 스스로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즐길 수 있도록 이미지 위주의 ‘길 찾기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덕분에 박물관에 방문한 아이들은 더 이상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다니지 않게 됐다. 자신 스스로 얻고 싶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은 디자인 하나가 아이들의 박물관 관람 문화를 바꿔놓는 순간이었다.
 
‘UN 어린이 권리 조약’을 사회 곳곳에 알리다
 
스웨덴에서의 경험은 어린이 권리에 눈뜨게 했다. 유학 시절, 엄효정 디자이너는 ‘UN 어린이 권리 조약’이 바탕이 되는 디자인을 해야 제대로 된 어린이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UN 어린이 권리 조약은 세계 모든 나라의 어린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규정한 국제 협약이다. “스웨덴에서 어린이 관련 디자인을 하려면 권리 조약을 항상 거울처럼 들여다봐야 합니다. 아이들 권리 침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죠. 이미 유럽에서는 어린이 권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실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요.” 
‘길 찾기 시스템’도 UN 어린이 권리 조약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UN 어린이 권리 조약 중 ‘아이들은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얻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을 디자인으로 구현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엄효정 디자이너는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의식이 자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UN 어린이 권리 조약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조약의 각 조항을 시각화한 것이 그 예다. 권리 조약의 내용들을 귀여운 캐릭터로 재탄생시켰고 이를 열쇠고리와 배지 등으로 제작했다. 어려운 내용 탓에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외면해 버리는 조약을 친근하게 느끼게한 것이다. 작은 노력이지만, 어린이의 권리 조약이 삶 속으로 들어온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아이들이 UN 어린이 권리 조약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엄효정 디자이너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권리를 알고 성장하면 훗날 건강한 시민이 될 확률이 높아지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어릴 때부터 내 권리의 소중함을 알면, 남의 권리도 소중히 여기게 돼요. 그러면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을 자제하게 되죠. 어린이 문화가 이러한 권리 들을 자연스레 내포하여 사회에 안착하면 사회가 좀 더 좋은 쪽으로 발전 하는 거죠.”

한편 권리 조약은 어린이 상품 시장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길잡이도 되었다. 엄효정 디자이너는 현재 어린이 상품 시장이 큰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어린이 관련 상품의 사용자는 어린이지만, 구매는 어른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렇다보니 어른들이 사용하지 않는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어른들의 취향이 반영 돼 만들어진다. 실사용자의 요구가 제조 과정부터 구매 과정까지 반영되지 않다 보니 어린이가 진정 원하는 놀이 도구와 상황이 왜곡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때 권리 조약을 바탕으로 디자인하면, 어린이의 의견이 절실히 반영된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질 높은 놀잇감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엄효정 디자이너의 생각이다. 이러한 확신은 ‘Play 31’이라는 회사를 세우는 바탕이 됐다.
 





엄효정 디자이너 표 놀잇감이 탄생하다

‘Play 31’은 어린이 놀이와 관련된 제품을 디자인하는 회사다. 이름 또한 UN 어린이 권리 조약에서 따왔다. “어린이는 놀이가 직업입니다. 놀이를 빼고선 어린이 문화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그래서 놀이, 휴식 보장과 관련된 31조가 특히나 중요한데 이는 제 디자인 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때문에 회사의 이름도 조약의 내용을 넣어 권리의 중요성을 강조했어요.”

실제로 그가 디자인한 모든 것에는 UN 어린이 권리 조약이 녹아 있다. 한 기업과 손을 잡고 만든 ‘놀이 구급상자’가 바로 그 예다. 놀이가 필요할 때, 긴히 쓰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들은 상자를 제 손으로 만들고 상당 부분을 자신이 마음 가는 대로 디자인한다. 어른들이 놀이의 형태를 제시해 주지만 놀이를 완성하는 건 아이들이다. 상자 아래 ‘활동지 뽑기’는 아이들 의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로 많은 아이와 접촉하며 하고 싶은 놀이를 제안받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활동지를 만들었다. 활동지 중 ‘엄 마에게 잔소리하기’, ‘예쁜 척하기’ 등의 내용은 아이의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사실 ‘놀이 구급상자’는 일반 아이들보다 환아(患兒) 에게 더 유용하다. 입원한 아이들은 놀 공간이 마땅치 않다. 이 아이들에게 주어진 놀이 공간이라고 해봤자 침대와 식사용 테이블뿐이다. 또한 병원은 제약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소음이 일어나선 안 되고 치료에 방해가 되는 움직임이 큰 놀이도 제한된다. 이러한 제약들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놀이 구급 상자’를 계획했고, 그 계획의 시작에는 역시 UN 어린이 권리 조약이 있었다. 모든 아이들은 평등하고 소외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놀잇감에 실현한 것이다.

계획부터 결과물까지 어린이의 권리를 입각해 만드 니, 그야말로 ‘실속 있는 놀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병원이라는 공간 특성상 마땅한 이야깃거리가 없어 대부분의 아이와 부모가 대화 단절을 겪는데, 이 놀이를 통해서 극복했다는 평이 심심치 않게 들려와 더욱 의미 있는 놀잇감이 되었다. ‘라이트 브러시’라는 놀잇감 역시 일반 아이들과 아픈 아이들이 놀잇감에 있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권리를 반영했다. 긴장 이완과 심리 안정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밖에 ‘라이트 스토리 상자’는 조약의 내용 중 ‘자유로운 의견 표현과 존중의 권리’를 실현한 놀잇감이다. 상자 속 조명이 켜지는데, 그위에 다양한 재료를 배치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표현한다. 아이의 의견이 놀잇감에 묻어나게 하여, 아이가 ‘주체’가 되게 한 것이다. 엄효정 디자이너는 아이에게 “이건 이렇게 놀아야 하는 놀잇감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를 능동적 존재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며, 이러한 말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설명서 없는 놀잇감은 중요해요. 정답이 없는 ‘라이트 스토리 상자’ 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퍼즐을 맞추지 못해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놀잇감이 아니라, 아이가 중심이 되게 하는 놀잇감인 거죠.”
 
‘유기농 채소’ 를 만드는 디자이너
 
현재 엄효정 디자이너는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놀잇감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아직은 아디이어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중증 뇌병변’ 아이들을 위한 놀잇감을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중증 뇌병변 아이들은 신체 중 자율적으로 조절 할 수 있는 부분이 입 밖에 없어, 가지고 놀 수 있는 놀잇감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어쩔 수 없이 놀잇감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놀잇감은 1차 적으로 그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지지만, 일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데 큰 무리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권리 조약을 바탕으로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제대로 된 놀잇감을 만들고 싶어요.”

엄효정 디자이너 같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중심의 놀이 문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오랜 전부터 어른들의 관점으로 구조화되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엄효정 디자이너 또한 이러한 점을 익히 알고 있다. 아직 판매가 잘 이뤄지지 않지만, 제대로 된 어린이 놀이 문화를 만들겠다는 목표와 방향은 분명하다. 유학 시절, 엄효정 디자이너는 스웨덴의 한 장난감 회사 관계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관계자가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혀 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를 ‘유기농 채소 같은 장난감’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칭하더 라고요. 유기농 채소는 아이들한테 꼭 필요한데, 막상 판매가 잘 되지 않습니다. 저희가 만드는 장난감도 아이들에겐 좋지만, 기존의 장난감에 익숙해져 부모와 아이들이 잘 찾지 않죠. 잘못된 것들이 깊게 뿌리박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치는 일이 제가 할 일이고요.”

건강한 놀잇감은 아이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주고 행복을 살찌운다. 시중의 값비싼 장난감들보다 그의 작업실에서 완성되는 장난감이 더욱 빛나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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